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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트리비아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다

by RE: 아날로그 2022. 10. 4.

보드게이머라면 누구나 이 기분을 아실 것입니다. 새로운 보드게임을 사서 비닐 포장을 조심스레 뜯고(또는 취향에 따라서 비닐 포장을 활용해 박스를 코팅하고), 박스를 열어 풍기는 카드와 나무 토큰의 풋내를 맡으며 컴포넌트를 검수하고, 카드 하나하나 설명을 읽으며 프로텍터를 씌우고, 룰북을 읽으며 게임을 플레이할 준비를 하는 그 기분을 말이지요. 초회 차 플레이를 마치면 선반에 게임을 진열하며 나만의 보드게임 컬렉션에 또 하나의 퍼즐 조각을 꿰맞추곤 합니다.

 

하지만 보드게이머라면 또 이 기분을 아실 것입니다. 이른바 '갓-게임'이라고 불리는 신작을 하나씩 사서 진열하다 보면, 막상 플레이 횟수가 2~3회 남짓에 불과한 게임들이 약간의 먼지가 쌓인 채로 잠들고 있는 것을 보는 착잡한 기분을 말이지요. 우리는 역설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익숙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유하고 있는 게임 중에 몇 차례 플레이 못해본 보드게임에 안쓰러움과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10x10 챌린지를 기록하는 보드. 보드게이머답게 아이콘이 미플 형태이다.

 

해외의 보드게임 커뮤니티에 한때 유행했으며 지금도 이 운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10x10 챌린지'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임 10개를 골라서 적어도 10번씩은 플레이해보자는 취지에서 챌린지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도전하면서도 의외로 또 많이 실패하는 챌린지입니다. 헤비 볼륨의 게임을 10번씩 10번 플레이한다면, 단순히 계산해봐도 한 판에 2~3시간 남짓 소요되는 100판의 게임이 결코 쉬운 도전은 아닙니다. 그래도 게임 플레이 횟수를 체크하는 챌린지를 통해 보드게이머가 '내가 산 이 게임은 나한테 합리적인 소비였는가, 아니면 낭비였는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는 좋은 계기였습니다.

 

자, 그래서 정신 차려보니 보드게임을 '수집'하는 당신! 과연 잘못된 행동일까요? 사실 다른 취미에서도 숱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인지라, 우려하시는 만큼 악한 행동은 아닐 것입니다. 스팀이나 에픽게임즈와 같은 디지털 게임 플랫폼에서도 수많은 게임을 라이브러리에 쌓아두고 늘 하던 게임만 하는 게이머가 있는 것처럼, 더 나아가 수집 자체만으로 만족감을 얻는 다른 많은 취미들도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누군가가 병뚜껑이나 우표를 모은다고 해서 쓸모없거나 돈 아까운 행동이라고 치부하지 않는 것처럼 '취미'라는 영역을 우리는 서로 존중하니까 더더욱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게임의 태생이 '플레이하기 위한' 친구들인데 이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요?

 

그 해에 출시된 보드게임의 수는 00~10년대의 전성기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출처: McGeddon)

 

가장 간단하게는 '살 만한 게임만 사서 즐기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였으면 우린 이렇게 고통받지 않을 것입니다. 유러피안 보드게임이 세계에 알려진 90년대 후반과, 그로 인해 게이머즈 게임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보드게임 디자이너들의 르네상스가 201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보드게임이 실제로 정말 많이 출시되었기 때문이지요. 순식간에 새로운 물결이 밀려 들어오니 선택지가 넘쳐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당대에만 유행했던 게임의 인기가 식는 경우도 있었지만, 명작이라 부르는 보드게임들도 해가 지나면서 꾸준히 늘어났으니까요.

 

그래도 내 안에 숨겨진 나의 충동적 소비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1쇄가 출시된 이후 2쇄 소식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구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인기가 많은 보드게임이라면 2쇄, 3쇄 등 꾸준히 새로 인쇄될 것이고, 더 나아가 내용물이 업그레이드되거나 오타가 검수되는 등의 괜찮은 후속 조치를 거쳐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 이후 추가 출시 소식이 없다면 중고 거래를 이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보드게이머라면 박스의 손상 여부나 카드의 상태 등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 마음을 어느 정도 내려놓으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보드게임은 세우지 말고 눕혀서 보관하는게 맞지 않은가? (출처: Forbes)

 

더 나아가, 보드게임 소비의 방향을 새 게임을 구입하는 것 이외에 '기존 게임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고려해보면 좋습니다. 확장팩이 꾸준히 출시되는 경우 게임을 더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고, 종이 토큰을 메탈 코인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등의 물리적 진화를 거치는 것도 같은 게임을 더욱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됩니다. 게임을 보관할 때도 진열장에 책처럼 끼워 넣는 방법을 많이 이용하지만, 세로로 세워서 보관할 때 박스 내부에서 게임 컴포넌트가 섞이는 일을 방지할 겸 공간을 넉넉하게 확보해 전시장처럼 진열하는 것도 좋습니다. 물리적으로 공간을 많이 차지하게 함으로써 '진열장을 꽉 채워야 하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가 보드게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체크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보드게임을 함께 즐기는 멤버가 주로 누구인지, 어떤 스타일의 게임을 많이 즐기는지, 취미로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은 어느 정도 되는지,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 또는 '수집'하기 위해서 사는 것인지를 따져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일 것입니다. 물론 그게 쉬웠으면 이런 고민까지 하진 않았겠지요. 당장 저만 하더라도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되면 집 안에 나만의 보드게임 방을 만들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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