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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트리비아

"얘는 게임인데 왜 이렇게 심각해져?"

by RE: 아날로그 2022. 9. 30.

친구들 혹은 가족과 함께 보드게임을 플레이하는 상황을 떠올려봅시다. 다 함께 한자리에 둘러앉아 승부를 펼치는 모습은 보기 좋습니다만, 대결을 펼치는 양상에 따라 때론 분위기가 과열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 게임을 하면 이기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게임에서 과하게 견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짜증을 낸다거나, 심지어 게임 문화에 미성숙한 태도를 지닌 일부 어린이들은 게임 중 속임수를 써서 몰래 카드나 자원을 더 가져온다거나 점수 계산을 부풀리는 일까지 생기기도 합니다. 게임에서 졌을 때 크게 실망해 한동안 분위기가 침울해져있는 경우도 있고요. 이럴 때마다 우리는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건넵니다. "아니, 게임은 게임일 뿐이야. 왜 이렇게 심각해졌어?"

 

이에 대한 해답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뇌는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맙소사, 디지털 게임이 지금까지도 부정적인 시각에 맞서 싸우고 있는데, 여기에 장작을 집어넣고 기름을 붓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는 플랫폼이 디지털이든 아날로그이든 상관없이 적용되는 이야기니까요. 디지털 공간에서 더욱 현실적인 그래픽 묘사를 하고 있어서 유독 일부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공격을 많이 당했지만, 보드게임을 포함해 '게임'이라는 형태는 다양한 종류의 시뮬레이션에 해당하고 이들도 역시 뇌가 헷갈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설명하는 내용은 UCLA에서 뇌신경과학을 연구하는 박사후연구원 '던 본(Don Vaughn)'씨의 과거 인터뷰 및 연구자료를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원문과 그의 주장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그의 사이트(Don Vaughn)를 통해 더 자세한 연구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전체 진화사를 들여다보면 야생에서 다른 개체와 고군분투하던 시간이 훨씬 길다.

 

아프리카에서부터 발원한 인간의 전체 진화사를 24시간의 시계로 치환하였을 때, 인류가 디지털 기기를 만나 사용하게 된 시간은 단 1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까마득히 훨씬 오랜 시간 동안 야생에서 맹수의 위협과 맞서 싸우며 지냈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빠르게 지식을 터득해 문명을 일궈냈지만, 우리의 몸의 어떤 부분에서는 야생에서 살던 당시의 메커니즘을 미처 잊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뇌는 현실과 시뮬레이션을 구분하는 능력이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에이, 우리가 영화나 게임을 현실이랑 구분하지 못한다고요?"라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봅시다. 공포영화를 보면서, 스크린에서 으스스한 공간을 조명하고 있고 귀신이나 괴물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등골에서 식은땀이 나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낍니다. 공포를 느끼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오싹함을 즐기기 때문에 우리는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같은 공포영화를 정말 여러 차례 반복해서 보아서 더 이상 무섭거나 놀랄 포인트가 없다는 것을 알더라도, 일부 사람들은 귀신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또다시 움찔하곤 합니다. 사람마다 그 반응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의 뇌는 여전히 실존하지 않는 시뮬레이션(여기서는 영화)를 보면서도 신체 반응이 일어납니다. 마치 야생에서 맹수를 만나도 침착하게 맞서 싸울 자신이 있는 사람과, 겁을 먹고 도망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열차의 도착(1895, 뤼미에르 형제). 스크린에서 튀어나오는 열차는 관객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에는 그래픽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시각적인 혼동이 생겨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영화와 영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흑백 영화는 지금 우리가 봐도, 처음 흑백 영화를 구경했던 사람도 영상이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현실 세계가 흑백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흑백 '영화'를 처음 봤던 사람들은 스크린에서 증기 기관차가 관람객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모두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넘어지고 도망치기 바빴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그것이 비록 흑백일지라도 시뮬레이션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고 오감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영화를 예시로 긴 설명을 드렸지만, 게임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시뮬레이션에서도 우리의 뇌의 회로가 다르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정하는 어떤 상황에 대해, 실제 경험을 느끼는 뇌의 영역이 똑같이 활성화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시타델에서 내가 두둑이 모아둔 금화를 도둑한테 모두 털렸을 때, 실제 돈과의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뇌가 진짜 돈을 잃는 것처럼 상실감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게임은 우리한테 손해를 끼칠까요? 그럴 리가요! 우리의 뇌가 그렇게 반응하기 때문에 모든 시뮬레이션, 소설, 만화, 영화, 음악, 게임 등의 모든 문화 콘텐츠가 우리한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시뮬레이션 속에서 다른 타자(플레이어)와의 교류를 통해 얻는 친밀감도 우리 뇌가 진짜로 옥시토신(사랑과 신뢰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을 방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던 본 씨는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 하더라도, 우리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문명사회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니까요. 누군가와 맞서 싸우는 승부를 펼치는 게임에서는 정말로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이 분비되어 싸울 준비가 되어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게임'을 하고 있는 거지, 들판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죽이는 대결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고 생각되면, 차라리 덜 복잡하고 단순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도 좋습니다. 온라인 게임에서도 현실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를 플레이하면 가뜩이나 거슬리는 것도 많은데 신경 쓸게 많아져 불리한 상황이 조금만 이어져도 화를 내고 악성 채팅을 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롤을 하기에 많이 지치고 머리가 아프다면, 그리고 본인이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면, 애초에 게임이 주는 스트레스 상황을 줄이는 것이 현명한 게임 선택이 될 것입니다.

 

또, 게임이라는 테두리에서 스포츠를 즐기고 있음을 상기하여 플레이어가 속임수를 쓰지 않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간혹 이렇게 경기를 진행하려 하는 경향이 큰데, 게임의 승패를 떠나서 속임수를 쓰는 것은 게임을 망치는 행위임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아이가 이기고 싶어 해서 떼를 쓴다면, 차라리 게임을 시작하기 전이나 끝낸 후에 전략에 대해 같이 논의해보고 승부를 건전하게 풀어나가는 방법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게임의 난이도를 조절해 다른 게임으로 바꾸는 것도 좋습니다. 어른도 하물며 뇌의 지배를 받아 게임에서 화를 내고 열이 뻗치는데, 어린아이라고 다른 마음이겠습니까? 즐거운 '게임'이 중요한지, '즐거운' 게임이 중요한지 되새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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