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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트리비아

역사라는 위험한 양념

by RE: 아날로그 2022. 10. 2.

게임에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물론 스토리를 모두 걷어내고 도형과 추상적인 표현만으로 구성한 게임도 있습니다만, 보통은 게임에 '테마'와 스토리를 입히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게임보다 스토리에 조금 더 집중한 '인터랙티브 필름'도 있고,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해 플레이어가 직접 흐름을 쫓아가는 '오픈 월드'도 있고,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더라도 스토리를 통해 여러분이 어떤 임무 혹은 승리 조건을 달성해야 하는지 제시하곤 합니다. 보드게임에서도 여러분은 다양한 테마와 상황을 마주하게 되고, 스토리 속에서 직접 이해당사자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보드게임은 유독 스토리의 소재에 '역사'를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전 포스팅에서 다루었듯 유러피안 보드게임에서는 직접적인 공격과 침략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역사 속의 경제적 집단(한자, 길드, 혹은 근현대의 사업가)이 되어 번영하는 국가 혹은 부유한 단체를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곤 합니다. 가령 '티켓 투 라이드(2004)'에서는 태동기의 미국에서 도시 사이의 열차 노선을 구축하는 열차 회사가 되어 남들보다 먼저 노선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펼치고, '버건디의 성(2011)'에서는 15세기의 제후가 되어 자신의 영토에서 교역을 펼치고 다양한 건축물을 조성해 명성을 키우게 됩니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보드게임이 역사 혹은 사회 과목의 수업 교구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게임이라는 재미있는 과정을 통해 역사를 '재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력적인 교구가 될 수 있으며, 직접 역사적 변화를 이끌어나가며 역사라는 '이미 결정된 사실'에 과감한 가정도 집어넣어 볼 기회가 생깁니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한테 주어진 액션은 당시 활동의 흐름을 추상적으로 깎아낸 선택지이며, 게임을 돌아가게 만드는 메커니즘은 게임이 담고 있는 메세지기도 하지요. 다만, 이를 역사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수업에 사용되는 영화를 바탕으로 충분한 부가 설명과 활동을 덧붙이는 것처럼,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이외의 충분한 배경 설명 탐구 시간이 필요합니다.

 

푸에르토 리코에서는 대서양을 건너온 노예를 노동력으로 사용한다. (출처: @wizardless, BGG)

 

그런데 역사를 소재로 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이 현재와 관점의 차이가 생겨 문제를 빚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전부터 꾸준히 문제가 제기되었고 최근에 보드게이머들한테 화젯거리인 소재가 바로 '푸에르토 리코(2002)'입니다. 푸에르토 리코에서 여러분은 스페인 제국의 총독이 됩니다. 푸에르토 리코를 발전시켜 농작물을 수확하고 가공해 수익을 내는 제국주의 식민지 플랜테이션 농업을 메인 소재로 삼고 있는 게임입니다. 지금까지도 탄탄한 팬덤이 다양한 전략을 연구하고 있을 만큼 인기가 숱하게 좋고, 출시 당시로부터 꽤 오랜 세월 BGG 랭킹 1위(2002~2008, 이후 '아그리콜라(2008)'에 왕좌를 내줬습니다.)를 차지했던 시스템 탄탄한 유러피안 보드게임이지요. 문제는 이 테마 때문인데, 이주민을 실어 오는 배의 토큰이 갈색빛을 띤 토큰으로, 아프리카에서 납치 및 포획한 흑인을 대서양 건너까지 실어와 사용하던 과거의 행동이 그대로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당시의 제국주의의 악행일 뿐 현실의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게임이 역사 수업의 교구로 활용되었다면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습니다. 수업을 지도하는 사람(교사 또는 교수)이 있기 때문에, 식민지 주민을 동원해 농업을 지었던 당시의 사회상을 보고 이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제국주의적 관점을 비판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게임 내에서 이를 조명하는 시선 그 자체입니다. 교습자 없이 게임의 시스템만으로 보았을 때, 노예를 데려와서 노동시키는 것에 별다른 페널티악명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다른 매체에서도 식민 지배와 노예를 소재로 하는 작품은 많지만, 적어도 그런 모습을 긍정적으로 조명하는 작품은 없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현재의 인류는 국가와 인종에 상관없이 모두를 평등한 존재로 다루고 있기에 과거의 불평등을 따라가지 않기 위해 지금도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작품에서도 흑인과 유색인종을 노예로 삼아 부당하게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동을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매체와 다르게 '게임'이라는 환경은 사용자(플레이어)가 직접 나서서 할 수 있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소설과 영화처럼 작가(감독)가 정한 스토리를 따라 읽는 것이 아닌, 한 판의 경기에서 나만의 스토리를 직접 만들며 플레이어가 직접 '능동적으로 재현'하게 됩니다. 단순히 노예제도를 소재로 삼아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게임 속에서 노예를 데려와 일을 시키는 것이 누가 봐도 경제적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드게이머들 사이에서도 '푸에르토 리코는 노예 제도가 효율적이라는, 현대에 와서는 받아들여져선 안 될 잘못된 메시지를 심어주고 있다'라고 의견이 제시되어왔습니다.

 

엔데버의 룰북 中 노예 제도 폐지로 효과를 노예 카드의 모든 효과를 뱉어내는 보라색 플레이어.

 

물론, 노예 제도를 소재로 삼는 모든 게임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제국주의 열강의 시대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 게임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노예 제도의 종말을 구조적으로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령 '콜로니얼: 해외의 유럽 제국(Colonial: Europe's Empires Overseas, 2011)' 보드게임의 경우, 게임 초반에 노예가 아주 저렴한 노동력으로 등장합니다. 플레이어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노예 제도에 손을 대게끔 유혹받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충분히 거대한 경제력을 가진 제국이 되었다면, 오히려 노예를 거래할 때마다 외교적 제재가 가해져 전쟁에서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엔데버(Endeavor, 2009)'에서도, 노예 제도 카드 덱의 뽑기 레벨이 낮고 트랙 발전 아이콘도 들어있어 초반에 플레이어들을 유혹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유럽의 5레벨 자산 카드를 획득하면 노예 제도가 폐지되고, 그에 따라 모든 플레이어는 노예 카드의 효과를 취소하고 뒤집어서 감점으로 받게 됩니다. 노예무역의 시작과 끝을 조명해 플레이어한테 경제성도덕성 사이에서 고민하게 만들고, 그 결론으로 노예 제도는 역사적 한계가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한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다가옵니다.

 

새로운 테마로 출시되는 '푸에르토 리코 1897'

 

푸에르토 리코는 올해에 '푸에르토 리코 1897(2022)'로 테마를 바꾸어 출시될 예정입니다. 과거의 푸에르토 리코가 스페인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을 다루었다면, 이번에 새로 출시되는 푸에르토 리코에서는 스페인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어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1897년으로 돌아가 푸에르토 리코의 농민이 되어 땅을 다지고 도시의 인프라를 재개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보드게임 시장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자국에서 문제 되지 않았던 테마가 다른 나라에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역사를 테마로 한 게임들이 아무래도 유럽인의 관점에서, 또는 미국인의 관점에서 다뤄지다 보니 비(非)서구권 문명의 관점과 충돌하고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게임이라는 플랫폼에서 전 세계인이 대화를 나누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사고 과정을 엿보며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은 앞으로도 좋은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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