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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트리비아

전쟁 중에 마주친 유희

by RE: 아날로그 2022. 10. 7.

사진을 클릭하면 사진의 출처인 '러시아인 탈출 행렬' 소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뉴욕타임즈)

 

세상이 혼돈에 빠져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전 세계가 다 함께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러시아는 전쟁에 투입할 추가 병력을 모으기 위해 젊은이들은 물론 노인과 장애인까지도 무차별적으로 징집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 반전 시위를 펼치다 공권력에 의해 진압당하고 잡혀가는 사람들 소식도 들리고, 인근 국가로 대피하는 사람들의 소식도 들려옵니다. 뉴욕타임즈의 보도 소식에서는 그 중 키르기스스탄으로 탈출한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치솟는 임대료와 숙박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러시아인이 국경을 넘어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로 모여들었으며, 누울 자리를 찾지 못해 길거리를 방황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운 좋게 숙소를 잡을 수 있었던 러시아인들의 사진이 한 장 담겨있었는데, 잘 보면 사람들이 모여서 게임을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바닥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지만,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스플렌더'를 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해 보입니다.

 

'무슨 전쟁통에 보드게임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쟁과 천재지변 속에서도 우리는 의식주 이외의 다양한 활동을 추구해왔습니다. 오히려, 민간인이 전쟁에 휘말리는 경우는 근현대전에 와서 심해진 것이고 중세의 전쟁이라고 하면 그저 세금을 낼 영주가 바뀌는 전쟁일 뿐이었습니다. 긴장과 불안감 속에서 살고 있기에, 이를 달래기 위한 놀이 활동은 의외로 당연하기도 했습니다. 전쟁 중에 참호 속에서 트럼프 카드로 카드놀이를 즐기는 병사들을 찍은 사진을 보면 더욱 와 닿을 것입니다.

 

포탄이 날아오지 않는 쉬는 시간(?)에도 병사들은 카드놀이를 즐겼다. (출처: Heritage Prints)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은, 전쟁 중에 태어나 지금까지도 유명한 보드게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앤소니 프랫씨는 파티가 열리는 부잣집과 호텔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한 피아니스트입니다. 그가 피아니스트 활동을 하던 1930년대 후반은 마침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이 유행하던 시기였고, 파티에서 호스트가 이 방 저 방에 범행 도구와 증거를 두고 '살인이다!'를 외치면 다 함께 범행의 진실을 맞추는 게임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다 1940년대의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영국에도 독일의 공습이 이어졌고, 프랫씨 역시 화학공장과 집을 오가며 일하다가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꼼짝없이 벙커에 숨어지내야 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민간인이 벙커에서 얌전히 숨어지낼 동안 사실 심심하거든요. 전쟁을 피해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추리 게임을 종이에 옮겨 담아 즐기곤 했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 그의 아내와 함께 게임을 손본 후 '살인이다! (Murder!)'를 만들었습니다. 1944년에 저작권을 인정받은 이후 와딩튼(영국의 카드 및 보드게임 출판사, 이후 해즈브로가 인수)에 게임을 판매하였으며, 1949년 새로 출시된 이 게임의 이름이 바로 '클루(Cluedo, Clue)'입니다!

 

농담처럼 나오는 이야기 중에,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국민이 살기 힘든 시절일 때 대문호가 나타나 불멸의 고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처럼 예술가한테 주어지는 재화가 풍부할 때도 많은 예술작품이 나왔지만, 반대로 인간 사회의 참혹함이 드러날 때도 그 못지않은 예술이 펼쳐진다고들 합니다.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또다시 러시아에 대문호가 등장하는 거 아니냐는 차마 웃지 못할 농담이 들리곤 합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보드게임(카드게임)을 통해 긴장과 불안감을 떨쳐내었단 이야기를 했지만, 무엇보다도 전쟁이 마무리되어 모두가 평화롭게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과 게임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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