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드게임: 트리비아

팬데믹 효과

by RE: 아날로그 2022. 10. 6.

'팬데믹 효과'라는 제목을 보고 COVID-19로 인한 사회적 변동을 다루는 글 아닐까 추측하셨다면 틀리셨습니다. 여기서 말할 팬데믹은 플레이어들이 다 함께 세계에 퍼진 바이러스를 퇴치하고 백신을 만드는 '팬데믹(2008)'이라는 보드게임입니다. '협동' 장르의 보드게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력한 인지도를 자랑하며, 특히 실제 COVID-19 상황과 맞물렸을 때는 보드게임들 중에서 구글 검색량 1위(그것도 2위의 검색량의 2.7배 이상 차이)를 굳건히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컸습니다.

 

팬데믹에서 플레이어는 하나의 직업을 담당합니다. 위생병, 검역 관리자, 과학자 등 다양한 직업이 존재하며, 플레이어 사이에 어떤 직업 조합으로 게임에 임할지 고르는 것도 재미 요소입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각 플레이어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 4개의 행동을 수행한 후 카드를 획득하며 턴을 종료하는데, 카드 덱에서 [전염] 카드를 뽑을 때마다 질병이 추가로 확산하여 게임의 난이도를 올려줍니다. 질병이 과도하게 퍼져 손 쓸 수 없게 되면(질병 큐브가 부족하거나, 확산 트랙을 다 채웠을 때 등) 패배하고, 네 종류의 바이러스를 억제할 백신을 모두 만드는 데에 성공하면 게임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나는 산티아고로 가서..." (찰싹) "당장 연구소를 지으라고!" (출처: DogandThimble)

 

그런데 '팬데믹 효과'는 게임에 대한 좋은 평가와 달리 안 좋은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팬데믹은 엄연히 '협동' 장르의 보드게임이라, 모든 플레이어가 힘을 합쳐 시스템(질병 확산)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게임에 이미 익숙하거나 자기주장이 강한 플레이어가 있다면 다른 플레이어가 액션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도를 강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한 명의 플레이어가 게임 전체를 이끌어가 버리는 일도 생기는데 협동 게임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현상을 '팬데믹 효과'라고 보드게이머들이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명명하였습니다. 물론 팬데믹이 출시되기 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가령 TRPG(Tabletop Role-Playing Game)에서도 각각의 플레이어가 액션을 상상하는 재미가 중요한데, 한 플레이어가 임의로 모든 상황을 제시하려는 경우가 있어 이걸 게임 마스터가 잘 관리하지 않으면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흥미를 잃기 쉽습니다.

 

팬데믹이 보드게이머들한테 유명해지자, 게임 디자이너들도 '팬데믹 효과'를 눈여겨보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협동 장르의 보드게임에서 계속 튀어나올 법한 심각한 문제였으니까요. 잘 생각해보면 원인은 명확합니다.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있고, 누구나 액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플레이에 간섭하기 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자만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개하지 못하게 하면 어떨까요? 협동 게임인데 '손에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 언급할 수 없습니다'와 같은 별도의 룰이 추가되어야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한다 한들 문제가 깔끔히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협동 게임인데 정보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는 룰이 들어가는 것 자체가 다소 모순이니까요.

 

'하나비(2010)'에서 내 카드를 나만 모르고 나머지 플레이어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비대칭 정보 구조를 활용한 게임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실제 개발에 소요된 시간이나 관련성을 알 수는 없지만) 팬데믹이 등장한 2008년 이후의 게임에서 새로운 구조를 많이 구경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비(2010)'에서도 플레이어 사이에 알고 있는 정보를 불균형하게 구성했습니다. 발상의 전환으로, 나만 아는 정보가 아니라 '나만 모르는' 정보가 등장하지요. 게임 카드를 반대로 (플레이어 입장에선 뒷면이 보이게) 들고 게임을 하기에, 다른 플레이어 모두는 내 카드가 무엇인지 알지만, 정작 나 자신은 내 손의 카드가 무엇인지 모른 상태로 게임을 합니다. 그 와중에 결정을 내리는 것도 자신한테 달렸기 때문에, 제한된 형태의 정보 공유 방식 안에서 모두가 신중하게 한 턴 한 턴 진행해야 합니다.

 

'네메시스(2018)'는 협동 게임임과 동시에 개인의 목표가 있다. (출처: Tabletop Games Blog)

 

또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랜덤성'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인데, 팬데믹의 카드 덱과 다르게 랜덤 요소를 현재 턴을 진행 중인 플레이어만이 해결하게끔 설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데드 오브 윈터(2014)'에서는 각 플레이어의 턴을 시작하기 전에 크로스로드(스토리) 카드를 한 장 뽑아 읽으며 진행합니다. 그리고 카드에서 특정 인물이나 특정 플레이어를 지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유일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 역시 게임을 너무 많이 반복해서 스토리에 해당하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모두 알고 있을 때 문제가 생기기는 하지만, 게임을 사서 그만큼 즐길 정도라면 충분히 게임을 구입한 가치는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협동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목표를 부여받기에, 다 함께 공동의 목표를 달성했어도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플레이어는 부분적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배신자 요소도 있지만, 이번 글 주제의 성격과 크게 달라져 여기에서는 따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아키펠라고(2012)', '네메시스(2018)' 등에서도 공동 목표와 개인 목표가 동시에 존재하는데, 이러한 장르를 'Semi-Cooperative(반(半)-협동)' 게임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건 플레이어들이 게임에 임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팬데믹 효과를 방지하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신경 쓰는 것도 있지만, 그 이전에 플레이어가 서로의 플레이를 존중해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협동 장르라는 울타리 안에서,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최적의 수를 떠올리기 이전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협동을 위해 우리는 서로와 소통하며 상호작용을 하는데, 토론하는 과정에서 여러 의견 중 하나가 선택될 수는 있어도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의견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이미 플레이어 간 배려가 부족한 것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잘 아니까'라는 마인드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건전한 설득과 토론을 진행하면 '협동'이라는 말에 걸맞은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