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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거게임즈 - 기획 이야기

기름기 쫙 뺀 게임 만들기

by RE: 아날로그 2022. 9. 20.

취향에 따라 선호도 차이는 있지만, 보편적으로 게임은 재밌습니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집중력'이라는 에너지가 있기에, 공부든 게임이든 오랜 시간 붙들고 있다 보면 어느새 집중력이 떨어져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흥미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게임을 설계할 때는 한 판에 드는 시간을 꼭 고려하게 되어있습니다. RPG 게임이라면 일일 콘텐츠와 기간 콘텐츠(주 단위 혹은 월 단위)를 나누어 일일 콘텐츠에 소모되는 피로도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단판으로 끝나는 게임도 매칭 인원수를 줄이거나 게임 속도를 올릴 장치를 집어넣어 이른바 '드러눕는 플레이'를 하지 못하게끔 설계하는 편입니다.

 

이는 보드게임에서도 당연히 통하는 말입니다. 보드게임은 특히, 일부 특이한 메커니즘을 제외하면 턴을 돌아가며 진행하기에, 장고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플레이어들은 기약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보드게임을 플레이할 때 어디에서 우리는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먹을까요?

 

장고하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지만, 플레이 타임을 늘리는 요소이다. (출처: Tinywoodenpieces.com)


# 룰을 배우는 시간, 혹은 재숙지하는 시간

 

디지털 공간의 게임은 새로운 한 판을 시작하는 세팅의 번거로움이 없기에, 일단 게임을 시작하여 규칙을 익히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날로그 공간의 게임은 규칙을 숙지하지 않으면 세팅을 포함한 게임 진행이 어려워, 게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룰북을 읽고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 플레이하는 게임이라 진행하는 내내 룰북을 읽으며 오류 플레이가 없는지 재확인해야 하기도 하고, 해봤던 게임이라도 오랜만에 진행하느라 다시 룰을 확인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플레이어가 게임에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려면 '잔룰'의 부피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잔룰'이라는 표현이 낯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메인 규칙을 설명한 후에 별도의 설명이 덧붙여져야만 하거나, 룰과 룰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 예외 규칙 또는 특수한 상황을 제시해야 하는 경우를 통틀어 일컫는 표현입니다. 대개 '잘 만든 게임'의 조건으로 잔룰이 거의 없음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각각의 카드에 별도의 룰이 적혀 있는 TCG/CCG와 같이 특정 장르의 보드게임은 잔룰이 필연적이기도 합니다. 보드게임을 설계할 때 메인 로직과 충돌하는 상황이 있는지 테스트를 충분히 반복해 룰을 다듬을 필요가 있으며, 룰 설명을 들은 플레이어들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와 같은 질문을 가능한 한 안 할 수 있도록 선택지와 세부 룰을 필요한 것만 남겨보도록 노력해봅시다.

 

#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다리는 시간

 

서두에서 다룬 이야기지만, 나의 행동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플레이어가 기약 없이 기다리다 지치는 일은 여러모로 좋은 기분이 아닐 것입니다. 게임의 볼륨이 작아서 선택지를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다소 헤비한 볼륨의 게임으로 올라갈수록 플레이어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의 싸움'에서 끝나면 다행이지만 보드게임은 다른 사람과 즐기는 게임이기에 이를 처음부터 고려하고 진행하더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한 플레이어의 행동이 다른 플레이어한테 영향을 미치게끔' 설계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도 개개인한테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게끔 말이지요. 견제 요소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공격적으로 다른 플레이어의 자원이나 점수에 손해를 끼치는 행동이 아닌, 게임의 공용 자원 풀(시장 혹은 은행의 개념)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설계해볼 수 있습니다.

 

# 나의 행동을 고민하는 시간

 

위의 이야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왜 고민을 하게 되었는가?'로 들어가 봅시다. 개인의 행동을 선택할 때 우리는 '이 행동이 나한테 최선인가', '이 행동보다 더욱 효율적인 행동이 가능한가'를 따져보게 됩니다. 이를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플레이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이 행동이 꼭 필요한가?' 정도로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꼭 필요한 행동(과정)인가?'라는 질문에 딱 잘라 정답을 말할 수 없습니다. 디자이너가 꿈꾸는 설계 구조에서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핵심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에, 게임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각오하더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게임의 흐름을 만들려 노력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핵심 메커니즘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이 이 게임에서 '양념'처럼 잘 어울리는지, 아니면 '쳐내야 할 가지'처럼 다소 과정을 길게 만드는 불필요한 것인지를 숙고해야 합니다. 가령 게임에 랜덤 요소가 필요해서 카드를 뽑는 과정이 들어있다면, 그것이 필수적인지 검토해보고 굳이 카드가 아니어도 된다면 다른 랜덤 요소(주사위나 룰렛 등)를 고려해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주사위를 굴리는 행동이 들어있다면, 주사위들을 하나씩 굴려야만 하는 이유가 특별히 없다면 동시에 굴리는 것을 고려해볼 수도 있습니다.

 

'테라포밍 마스'에는 수많은 카드가 있지만 아이콘 설명이 잘 갖춰져 있어 어려움이 없다.

 

고민한다는 것은, 승부 예측이 명확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누가 이기고 질지를 뻔히 알게 되면 참여욕이 떨어질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직관성'입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현재 상태를 판단하기 위해 공개된 정보가 잘 보이는지, 한눈에 잘 해석되는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많은 보드게임이 게임 속 행동 지시 또는 요소를 누가 봐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그림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대개 이러한 그림을 아이콘(icon)이라 부르고, 메인 메커니즘 자체가 복잡하더라도 아이콘화가 잘 되어있다면 사람들이 플레이하면서 잘 따라올 수 있습니다. 판단을 내리기 위한 시간 자체를 줄일 수는 없지만, 판단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충분히 줄일 수 있습니다.

 

# 게임을 세팅하거나 정리하는 시간

 

보드게임은 아날로그 게임답게 다양한 도구가 등장합니다. 특히 볼륨이 무거워질수록 게임 속에서 등장하는 카드의 양, 보드의 크기, 자원 토큰의 양 등 여러 요소가 평균적으로 더더욱 많은 부피를 차지하게 됩니다. 많은 것을 구현하고 싶은 욕심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지만, 순수한 게임 시간 이외에 게임을 설치하거나 다시 박스에 담는 과정이 길어지면 사람들은 '이 게임을 시작하려면 손이 많이 가는데...'라고 생각하며 부담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또, 게임 속에 등장하는 자원이나 카드가 많아지면, 자원을 가져가거나 지불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과, 카드 덱을 다시 섞을 때 걸리는 시간 등 실제 게임 시간 중간중간에 플레이타임을 불가피하게 늘리게 됩니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세팅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도 보드게이머의 피로감을 어느 정도 해소해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게임의 기름기를 빼는 방법을 정리해보았습니다. 게임을 설계할 때 마음에 드는 요소를 모두 집어넣고자 하는 욕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완성된 형태의 게임을 구성했다면, 테스트를 여러 차례 반복해 어떤 요소가 불필요한지를 점검해 제외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게임이 짧다고 항상 좋은 것도 아니고, 최적화와 거리가 먼 불편함을 선택한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좀 더 호소력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설계하고자 하는 의도 이상의 불편함이 끼어들어 게임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면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게임 시간이 짧아도 모두의 인상에 강렬하게 남은 게임이 있는가 하면, 게임 시간이 길어도 눈 깜짝할 새에 승부가 났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게임도 있습니다. 과연 내가 만들고 있는 게임은 어느 정도의 볼륨감에서 가장 플레이어들의 기억에 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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