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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거게임즈 - 기획 이야기

카탄 섬에서 게임 요소 분석하기

by RE: 아날로그 2022. 8. 27.

#1. 때로는 강도, 때로는 기사.

 

'카탄의 개척자(이하 카탄)'을 플레이하면, 좋든 싫든 주사위 7이 뜨고 강도가 나타나 우리를 괴롭힙니다. 강도가 문을 두들기고 내 집에서 자원을 하나 뜯어가는 것도 아프고, 무엇보다도 주사위가 7이 나오면서 원래 내가 기대할 수 있었던 자원마저 못 얻게 하니 여러모로 골칫덩이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강도를 이용해 내 땅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자원을 노릴 수 있습니다. 특정 자원을 얻기 위해 배치를 신중히 한다지만, 주사위를 이용하는 게임답게 내 땅에서 자원이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내 차례에 굴린 주사위로 다른 플레이어들 배만 불리는 기분이 들 때도 있지요. 그럴 때 주사위 7이 나와주면 카드를 수북하게 들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재산을 절반으로 만들어버리는 통쾌함도 있습니다.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으로는 볼륨 대비 역전 가능성을 키우는 것인데, 카탄의 경우 주사위를 통해 자원을 얻으므로 볼륨과 부담감을 줄였고, 강도를 이용해 과도하게 자원을 축적하는 일을 어느 정도 막아 후발주자가 따라갈 기회를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강도가 눌러앉은 땅에서는 자원을 생산할 수 없다. 벽돌을 얻을 수 없는 두 플레이어는 당황스럽다!

 

또, 주사위 두 개를 굴리면 통계적인 상식으로 보았을 때 7에 가까울수록 더욱 자주 등장하고, 2와 12에 가까울수록 더욱더 보기 힘들어집니다. 카탄 섬의 자원 산출량은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데, 강도는 이를 어느 정도 해결해주는 역할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강도가 서 있는 땅에서는 위치를 옮기기 전까지는 자원을 제공받지 못하기에, 전반적인 섬의 자원 산출량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직 모두가 마을을 확장하기 이전인 초반 게임에서, 가령 유일하게 모두가 나무를 공급받을 수 있는 공간을 제어하면 모두가 나무를 얻기 위해 다른 자원을 많이 소모하게 되는 등 카탄 섬 내의 경제 구조에 영향을 주기까지 합니다.

 

주사위 7이 나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강도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바로 발전 카드에서 등장하는 '기사'입니다. 단순히 주사위로만 움직였다면 강도마저 운에 맡기는 선택지였겠지만, 기사 카드를 노릴 수 있다는 시점에서 강도는 정치적인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강도의 원래 기능에 충실하게, 상대방과 교역하는 과정에서 협박용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한테 원하는 조건의 거래를 제안하고, 거절당하면 기사 카드를 사용해 상대방으로부터 강제로 자원을 뺏어오는 것이지요. 다만 게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고립된 생태계에서의 상부상조이기 때문에, 모두로부터 민심을 잃으면 오히려 게임에서 불리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에 반대로, 상대방의 땅에 눌러앉은 강도를 황무지나 중립 지역으로 옮겨주면서 민심을 얻는 방법도 가능할 것입니다.

 

카탄에서 볼 수 있는 상호작용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지정학적 위치인데, 건물(도로 또는 마을)을 짓고 나서는 어떤 이유로도 수정하거나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특정 자원을 얻기 위해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매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법의 압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위에서 말한 강도인데, 강도가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능력으로 인해, 게임의 전반적인 경제 구조를 변경하거나 다른 플레이어와의 정치적 관계를 이끌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주사위 게임일 수 있지만, 자칫 복잡할 수 있는 자원 관리 게임을 누구나 쉽게 손댈 수 있게 줄이면서도 서로를 압박하는 재미를 잘 살렸습니다. 그리고 강도는 카탄의 재미에서 중요한 하나의 기둥을 맡고 있습니다.


#2. 자원 관리 보드게임이 가져야 할 덕목이란

 

누가 뭐라 해도 카탄은 자원이 등장하고, 이를 어떻게 운용하느냐를 두고 싸우는 자원 관리류 게임입니다. 카탄 이전에도 자원 관리 보드게임은 있었고, 카탄 이후에도 다양하게 발전된 자원 관리 보드게임이 꾸준히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카탄으로 인해 수많은 게임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게 영감을 불어넣어 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탄으로 인해 '어떤 요소'가 꾸준히 다른 보드게임에 영향을 미쳤는지 하나씩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자원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수급되지 않는다!

자원 관리 능력을 두고 싸우기 위해서는 모두가 같은 자원을 받고 얼마나 잘 운용하느냐를 따질 것 같지만, 대부분의 자원 관리 보드게임에서 모두가 똑같은 자원을 획득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모두가 똑같은 양의 자원만을 얻을 수 있다면 대부분의 액션에서 모두가 선호하는 액션의 형태가 동일한 순서로 진행될 것이며, 선 플레이어에 가까울수록 훨씬 유리한 형태의 게임이 될 것입니다. 또는, 모두가 똑같은 자원을 받고 있다면 누가 더 최적화된 자원을 개발하느냐를 두고 일종의 퍼즐 게임을 하는 느낌을 줄 것입니다. 명확한 정답이 있다면 새로운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 테니까요.

 

# 자원을 통해 거둘 수 있는 승리의 형태가 다양하다!

카탄에서는 도로와 마을을 확장하는 사람, 모든 마을을 도시로 업그레이드하는 사람, 발전 카드만 주야장천 뽑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어차피 승점 모으는 게임 아니야?'라고 하지만, 승점을 모으는 방식을 다양하게 만들어두면 플레이어의 선택지는 더욱 다채로워집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자원의 수급처가 다양하고 각자가 다른 자원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만의 방법으로 승리를 향해 달려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카탄은 특히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각자의 전략이 상이할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 자원을 획득하는 방법이 다양하다!

카탄 섬에 정착했다면, 자신의 마을이 있는 곳으로부터 주사위의 숫자에 따라 자원을 얻습니다. 자원으로 길과 마을을 새로 지었다면 새로운 마을로부터 또 다른 자원을 얻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단순히 카드를 뽑아 자원을 얻는 것이 아니기에, 능동적으로 자원을 얻을 방법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카탄 이전과 이후로도 자신의 자원 혹은 자산을 스노볼링 하는 게임들은 있었지만, 특히 카탄은 유럽 스타일 보드게임의 초창기 스타였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사람들에게 스노볼링의 재미를 소개해준 중요한 단추라고 생각합니다.

 

또, 특정 자원은 많지만 다른 자원이 없다면 플레이어끼리 교환을 제시해 자원을 획득할 수도 있는데, 교역 요소가 있는 다른 게임에 비해 오히려 규칙이 자유로운 편입니다. 단지 교환을 희망하는 플레이어라면 누구든 서로 합의된 개수만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교역 요소가 양념처럼 등장하기에, 운에 의존한 자원 얻기임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스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으며, 자신의 차례가 아닌 플레이어도 항상 다른 플레이어의 플레이에 집중할 수 있다는 강력한 장점이 있습니다.

 

자원을 모아 다른 행동을 진행하는 게임은 당연히 매우 많습니다. 자원 관리 장르의 보드게임은 이후 '일꾼 배치' 장르나 '엔진 빌딩' 장르 등의 다양한 굵은 뿌리들로 명맥을 이어 나갑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원 관리라는 장르명이 매우 폭넓은 개념처럼 사용되지만, 1995년에 출시된 카탄의 개척자들은 2000년대의 수많은 '자원과 관련된 보드게임'들을 라이트 유저들에게 거부감없이 소개해줄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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