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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거게임즈 - 기획 이야기

운빨게임과 역전의 발판

by RE: 아날로그 2022. 8. 30.

'운'은 대부분 게임에서 크든 작든 큰 영향을 미칩니다. 보드게임에서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낮은 난이도의 게임에서는 주사위가 보통 등장하고, 난이도가 올라감에 따라 주사위보다는 카드를 이용한 랜덤 요소가 등장합니다. 그간 작성한 다른 포스팅에서 '운 요소'는 게임의 난이도를 낮춰주면서 후발주자가 1등을 따라잡을 수 있는 장치라고 종종 언급했었는데, 머릿속에서 단순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닌 뚜렷한 이미지로 '왜 역전 요소인가'에 대해 탐구해봅시다.

 

운이라는 요소는 통계학을 발전시킨 근간이 되었습니다. 도박꾼들의 주사위 게임에서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경우의 수를 연구하였고 상금의 분배를 위해 수학적 계산을 해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반대로 복잡한 계를 가진 게임 시스템에서 확률을 계산하기 위해 인류가 갈고닦은 통계학을 이용하고 있지요. 자, 그러면 여기서 '운'이란 무엇인가요? 게임 내에서 무언가를 획득하거나 특정 조건을 발생시킬 때, 내가 원하는 종류의 자원 또는 경우의 수가 등장하면 운이 좋다고 말할 것입니다. 즉, 운은 적어도 게임 안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 중의 하나가 임의의 확률로 실행되는 것'입니다. 인생사에서는 예기치 못한 일을 많이 겪는다지만, 주사위는 여섯 면이 모두 보이고, 카드는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 모두 알고 게임을 진행합니다. 적어도 게임 안에서는 모든 경우의 수를 읽을 수 있고 그중 내가 원하는 갈래로 이어지느냐에 따라 운이 좋다 혹은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전 요소라는 것도 단순히 선두 주자의 운이 안 좋고, 그와 동시에 후발주자의 운이 따라줘야 가능한 것일까요? 여러 플레이어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만, 역전 요소가 오직 이것뿐이라면 게임의 전반적인 만족도가 떨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주사위 한 방에 상대방한테 지는 게임이라면, 적어도 심각하게 고민해서 액션을 선택하는 전략 게임에서는 최악의 방향성입니다. 비교적 가볍게 즐기는, 웃고 넘길 수 있는 게임이라면 운 역시 즐길 거리 지만,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한 빌드와 테크트리가 상대방의 행운으로 인해 손쉽게 무너진다면 그 누구도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팬데믹의 감염 카드 덱. 전염이 터지면 그동안 사용했던 감염 카드가 덱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게임의 구조가 복잡하고 플레이어가 생각해야 하는 범위가 늘어날수록 게임 속 운의 요소는 더욱 신중하고 똑똑하게 녹아있습니다. 첫 번째로, 카드 덱에서 특정 카드가 공개 및 제외되면서 덱의 확률이 변한다는 점을 이용합니다. 그 예로 보드게임 '팬데믹'을 살펴봅시다. 플레이 카드 안에는 '전염 카드'가 섞여 있습니다. 카드를 보충하는 과정에서 전염 카드가 등장하면 보충이 중단되고, 감염률 마커를 1칸 전진시키고 새로운 도시가 감염되며(큐브 3개를 올린다) 버려진 감염 카드들을 다시 감염 카드덱 위에 올려둡니다. 여기서 집중할 것은 플레이 카드가 아닙니다. 간혹 플레이 카드를 그냥 섞어서 진행하시는 경우가 있지만, 룰북에 따르면 일정 더미로 분할한 이후 전염 카드를 올려두어 게임 전체에 걸쳐 균등하게 나올 수 있게 설계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전염 카드가 등장하면 그동안 사용했던 감염 카드를 섞어 다시 감염 카드덱 위에 올려두게 되면, 이전에 등장했던 카드가 다시 등장합니다. 일반적인 경우 덱에서 카드가 빠져나가면 해당 종류(팬데믹의 경우 도시)의 카드가 다시는 등장하지 않겠지만, 팬데믹의 감염과 재확산 컨셉에 맞게 '백신 개발로 질병이 근절되기 전까지는' 큐브가 올라갔던 도시에 또다시 큐브가 올라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자였다면 카드가 인도하는 대로 질병 큐브가 올라갈 뿐 특별한 위기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는 게임이 되었겠지만, 후자를 택했기에 랜덤 요소인 카드덱을 더 이상 랜덤 요소로 사용하지 않고 상황(위기)을 반복시켜주는 효과적인 장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독립 사건과 종속 사건을 이용해 예상할 수 있는 선의 장치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덱의 확률의 이야기와 맞닿습니다. 주사위를 굴려서 6이 나와야만 성공하는 판정이 있다고 해봅시다. 첫 주사위에서 성공할 확률도 1/6이지만, 이후 주사위를 던져서 성공할 확률도 계속 변함없이 1/6입니다. 즉, 각각의 주사위 굴림이 독립 사건이기에 하염없이 운이 따라주길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덱에서 특정 카드를 뽑아야 성공한다는 판정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 카드를 뽑지 못했을 때 덱에서 실패 확률은 점점 낮아집니다. 첫 번째 경우처럼 덱이 다시 섞이는 게 아니라면 성공 확률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고, 보드게임 및 카드게임에 익숙한 사람들은 '카드 카운팅'을 통해 이미 등장했던 카드들을 외우면서 게임을 즐기기도 합니다.

 

비단 카드뿐만 아니라 주사위 자체에서도 이를 잘 활용하고 있는데, '야찌(요트 다이스)'의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야찌에서는 주사위 다섯 개를 총 세 번까지 굴려 원하는 조합을 만들고 점수를 내는 게임입니다. 만약 한 번만 굴려서 조합을 만드는 게임이었다면 운에만 맡겨야 하는 주사위 노름판이겠지만, 주사위를 굴린 후 내가 원하는 주사위를 따로 빼낸 후 재굴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순간의 판단력을 발휘하는 재미를 살렸습니다. 주사위 다섯 개를 굴려 모두 같은 숫자가 나올 확률('야찌'가 나올 확률)은 0.07%지만, 원하는 주사위를 보관하면서 세 번까지 굴리면 그 확률은 4.6%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4.6%의 확률을 걸고 야찌를 향해 나아갈지, 그보다는 쉬운 조건의 주사위 조합을 노려 안정적으로 점수를 받을지 판단하는 것은 플레이어의 몫이기에, 이른바 '운빨'이라고 해도 잠재적 보상과 손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게임이 될 수 있습니다.

 

운이라는 것이 행운과 불운을 동반하지만, 불운한 현상을 완화해나가며 사용자의 손안에서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들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운이 관여하더라도 우리는 전략을 개발할 수 있고 게임을 비교적 합리적으로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카드를 드로우하셨다고요? 당신이 원하는 카드는 아직 덱 안에 들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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