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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거게임즈 - 기획 이야기

상호작용의 종류

by RE: 아날로그 2022. 8. 19.

보드게임을 하는 이유로 언급되는 큰 이유는 '대면 소통'입니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비대면 문화가 주류가 되었다지만, 우리는 늘 사람이 그립기에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규모의 차이일 뿐 같이 일련의 활동을 즐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의 테이블 또는 공간에 둘러앉아 서로 눈치싸움을 하며, 대화를 나누며, 두뇌 싸움을 하며 온라인으로는 느낄 수 없는 비언어적 소통을 즐기게 해 줍니다.

 

보드게임에서는 특히 비언어적 소통이 많다. 손의 떨림, 동공의 움직임...

 

다만, 상호작용이라는 말이 보드게임에서는 때론 '견제'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플레이어 간의 소통이 경쟁 게임에서는 보통 다른 사람의 점수 획득을 방해하거나 상대방의 조건을 이용해 나의 점수 획득을 노리는 것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상호작용이라는 거대한 키워드 안의 일부 상황입니다. 상호작용이 얼마나 공격적이냐에 따라 그 정도를 나눌 수 있을 것이고, 견제 요소라고 표현한다면 상대방의 계획이나 플레이를 얼마나 방해하느냐에 따라 그 정도를 따져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격적이라고 해서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대놓고 거짓말과 배신을 부추기는 늑대인간/마피아 장르의 게임을 봐도, 오히려 게임의 중요한 재미 요소로 받아들여집니다.

 

다만 견제 요소가 어떤 장르와 볼륨의 게임에 녹아있는가를 잘 따져볼 필요는 있습니다. 모든 게임을 늑대인간/마피아 장르처럼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특히, 초반의 빌드업으로부터 시작해 스노볼링을 굴리는 장기 전략이 들어가는 게임은 견제 요소를 신중하게 도입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견제 및 공격으로 인해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리면, 플레이어가 게임에 흥미를 잃고 물귀신이 되어 다른 플레이어의 발목을 붙잡는 그림이 나오면서 게임에서 이기지 못한 모든 플레이어의 기분을 망칠 수 있습니다. 타고난 공격적 운용 성향이 맞는 플레이어들끼리면 괜찮을지언정, 메인 메커니즘을 해치는 견제 요소는 디자이너의 의도를 희석할 뿐만 아니라 게임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극단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상호작용이 있는 게임은 대개 환영받습니다. 상호작용이 너무 얕거나 없는 게임은 집단적 독백 또는 솔리테어를 하는 기분을 줄 것이며 보드게임 고유의 매력에서 한 발 멀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상호작용의 형태에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보드게임, 아니 더 나아가 일반적인 모든 게임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로게임이 상대적으로 상호작용 요소가 적다지만, 특정 행동을 통해 상대방과의 수 싸움을 펼칠 행동들은 존재합니다. 스플렌더를 예로 들어봅시다. 스플렌더를 처음 플레이하는 사람은 자신의 개발 카드를 어떻게 지어 올릴지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스플렌더를 한두 판 남짓 플레이해본 사람은 각자가 자기만의 게임을 하는 느낌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스플렌더에서도 상대방의 행동과 개발 카드들을 잘 살펴보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상대방이 현재까지 모은 개발 카드로 다음에 구입할 카드를 엿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어떤 귀족 타일을 노리는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플렌더의 고수와 초보가 경기를 하게 된다면, 중후반에 가서 고수한테 귀족을 빼앗기고 넋이 나간 초보의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협력 요소가 있는 게임에서는 소통을 제한하여 도전적인 과제를 준다. (左: 코드네임 / 右: 하나비)

 

게임에서 상호작용으로 등장하는 장치들을 한 번씩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익숙한 요소는 직접적인 대화와 소통입니다. 파티게임에서 찾아보기 쉬운 형태로, 오히려 소통 방식에 제한을 두어 게임의 재미를 살리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코드네임을 살펴보면, 팀장은 팀원한테 단어 하나와 숫자 하나씩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팀원은 요원이 숨어있는 카드의 위치를 정확히 맞춰야 하며, 단어로밖에 힌트를 제공하지 못하는 제한적인 대화방식으로 인해 끊임없는 언어 퀴즈를 푸는 재미가 있습니다. 또 다른 예시인 하나비에서, 플레이어가 다른 플레이어에게 색깔이나 숫자에 대한 정보를 줄 때에 해당하는 모든 카드를 빠짐없이 언급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힌트를 들었음에도 각각의 카드를 기억해두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안겨주어 게임을 좀 더 도전적으로 만듭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협력 요소가 있다는 것이며, 각 팀원 혹은 참여자 모두가 하나의 팀을 이룰 때, 소통에 제한을 두어 정보 전달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면서 도전적인 재미 요소를 불어넣어 줍니다.

 

협상과 경매는 플레이어의 참여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강한 도구이다. (左: 아임 더 보스 / 右: 모던 아트)

 

또 다른 대표적인 소통 요소로 협상/경매도 있습니다. 카탄이나 보난자처럼 게임 안에서 획득할 수 있는 자원을 서로 교환하기를 희망하면서 이루어지는 협상도 있고, 아예 협상(아임 더 보스)이 메인이거나 경매(모던 아트)가 메인인 게임도 있습니다.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액션이 진행되기 때문에 가장 활발한 형태의 상호작용일 것이며, 모든 사람을 게임의 참여자로 붙잡아둔다는 강력한 장점과, 협상 또는 경매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하느라 게임 플레이 시간이 다소 길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간혹 대화에서 소외되는 플레이어가 재미를 못 느끼는 부정적 경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비교적 균등한 가치의 자원을 모두가 골고루 가질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원 밸런스만 적당한 수준에서 맞춰져 있다면, 나머지는 플레이어의 대화에 의해 게임이 흘러가게 되어있으니까요.

 

상호작용의 좀 더 절제된 형태로는 대응 행동이 있을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 정해진 규칙 안에서 누군가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으로 대응하는 방식입니다. 레지스탕스:쿠에서 누군가가 해외 원조(공급처에서 +2원을 가져오는 행동) 액션을 실행하려 하면 다른 누군가가 '공작의 대응 행동'으로 해외원조를 방해하는 방식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가 특정 행동을 실행하려 할 때, 그 효과가 발동되기 전에 행동을 직접 방해하는 액션을 택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I-cut-you-choose 장르도 이에 해당하는데, 특정 자원을 나눠가질 때 플레이어 A가 분배한 후 자원을 가져갈 권리를 플레이어 B한테 쥐어주는 형태입니다. 장르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 교양 수학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공정하게 케이크 나누기'의 아이디어를 게임으로 이식한 것입니다. 졸리 앤 로저, 하나미코지 등의 게임에서 이런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응 행동에서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한테 기회를 주는 경우가 많아, 좀 더 첨예한 두뇌 싸움 혹은 견제를 일으킬 수 있는 직접적인 상호작용입니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한테 기회를 안겨줄 수 있다. (左: 졸리 앤 로저 / 右: 하나미코지)

 

마지막으로 가장 공격적인 상호작용은 가로막기/블로킹일 것입니다. 말에서도 볼 수 있듯 직접적으로 상대방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이며, 위의 대응 행동은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비롯한 상대방의 견제였다면 여기에서는 누군가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행동 형태가 달라지거나 아예 행동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까지도 의미합니다. 처음에 예시를 들었던 스플렌더도 고수들끼리의 상호작용으로는 가장 공격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귀족 타일을 누군가가 먼저 달성했다면, 다른 플레이어는 똑같은 조건을 만족했더라도 해당 귀족의 점수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상대방의 카드와 행동이 모두 공개되기 때문에 사전에 이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공격성을 덜 느낄 뿐입니다. 우정 파괴범이라는 별명을 가진 시타델에서도 누군가를 라운드에서 아예 제거하거나 돈과 카드를 모두 빼앗는 등 과감한 블로킹 액션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기분을 직접 자극하는 짓궂은 재미가 있습니다. 내가 7점을 얻고 상대방이 12점을 얻느니, 내가 2점만 얻더라도 상대방이 3점밖에 못 얻게 만드는 복수귀 스타일이라면 더욱 흥미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게임은 사람 사이에서 사회적 경험을 공유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왔습니다. 먼 무역 길을 오가던 상인들끼리 교역소에서 시간을 때울 때, 유럽의 상류층들이 담소를 나눌 때도 게임이 있었으며 지금도 사람을 한데 모아주는 재미있는 도구입니다. 게임을 통해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갈 수 있다면, 게임이 끝난 후에도 여운이 남고 더 행복한 기억이 될 것입니다. 상호작용은 소통의 또 다른 방식이며, 자칫 취조가 될 수 있는 문답식 소통이 아닌 더욱 즐겁고 유쾌한 방식의 소통이라고 믿습니다. 아, 물론 같이 게임을 하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서 시타델 같은 게임은 조심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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