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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거게임즈 - 기획 이야기

주사위가 좋을까, 카드가 좋을까?

by RE: 아날로그 2022. 9. 13.

사람들은 운을 싫어하면서 좋아합니다. 정확히는, 불운을 싫어하고 행운을 좋아하겠지요. 게임 속에 예측할 수 없는 요소가 들어있을 때 사람들은 반복해서 시행해보기를 원하고, 잘 설계된 운은 사람들한테 매 판 게임의 신선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래서 운 요소, 랜덤 요소는 대부분의 게임에서 중요한 편입니다. 게임 속에 운을 집어넣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적어도 보드게임 안에서만 이야기해보자면, 가장 일반적인 두 방법은 주사위와 카드입니다.

 

TRPG에서 사용하는 주사위 세트. 정다면체 5종은 물론 10면체 주사위 두 개도 사용된다.

 

주사위는 보드게임에서 '손맛'을 담당합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손으로 도구를 만지면서 진행하는 보드게임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게임 속에서 사용할 재화 토큰을 종이가 아닌 메탈 코인으로만 만들어도 보드게이머들의 기분을 환기하기에 아주 좋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사위는 대개 정다면체(4, 6, 8, 12, 20)로 이루어져 있고, 고정된 확률을 가집니다. 주사위를 굴려 어떤 한 면이 나올 확률이 고정되어 있기에, 같은 내용을 두 면 이상 채우는 식으로 확률을 조정할 수는 있지만 고정 수치의 배수일 뿐 그 범위에 해당하지 않은 세세한 확률을 표현하기 힘듭니다. 수학적으로 더 파고들자면 좀 더 다양한 확률을 표현할 수 있는 카탈란 다면체를 활용한 주사위를 구상해볼 수 있겠지만, 정다면체를 벗어난 특수한 주사위를 만들기엔 큰 비용이 들 것입니다. 그나마 정다면체가 아닌 주사위라면 TRPG에서 많이 사용되는 엇쌍각뿔 형태의 10면체 주사위가 있습니다.

 

주사위는 보통 숫자를 표현합니다. 많은 사람이 정육면체를 먼저 떠올리지만, 위에서 말한 나머지 정다면체들과 10면체 주사위까지 통틀어 다양하게 사용되곤 합니다. 특히, 10면체 주사위를 두 개를 굴려 두 자리 숫자를 만들기 때문에 0부터 99까지의 숫자 표현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꼭 숫자만 가능한 것은 아니고, 숫자 대신에 각 면에 다른 아이콘이나 그림 요소를 집어 넣어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좀 더 특수한 공정이 필요하기에, 제작 단가가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는 제작하는 처지에서 걱정할 일이겠지만, 자신의 게임을 출판사에 제안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1인 출판을 하는 사람이라면 고민할 만한 문제입니다.

 

카드는 주사위에 비해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다. 텍스트 또는 삽화가 들어갈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카드에 관해 이야기해봅시다. 주사위와 다르게, 카드는 숫자 이외의 다양한 텍스트와 삽화를 넣을 수 있어서 더욱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카드를 읽느라 세부 룰 진행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거나 카드마다의 잔룰이 있는 경우도 생기지만, 그건 게임 설계 차원의 이야기라 차치하고 카드의 정보 속성에 관해서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카드는 앞면과 뒷면이 있습니다. 보통 뒷면은 같은 종류의 카드끼리 같은 무늬를 그려 넣어 구분하고, 앞면의 정보는 공개되기 전까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경우의 수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 주사위와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더 나아가 카드는 각각의 장수를 조절하여 더욱 세밀한 확률을 설정할 수 있게 합니다. 전체 카드 수 대비 해당 카드의 장수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서 원하는 확률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카드의 정보는 공개되기 전까지 알 수 없기에, 시스템으로부터 숨겨진 정보뿐만 아니라 상대 플레이어에 의해 숨겨지는 정보 등을 구성할 수 있어 조금 더 복합적인 설계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카드가 덱에서 빠지게 되면 남은 카드에 의한 확률을 계산할 수 있기에, 기억력을 곁들인다면 카드 카운팅으로 상황을 내다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카드가 항상 주사위보다 완벽한 것도 아닙니다. 우선, 카드는 보통 종이 소재이기에, 오염에 취약합니다. 사람의 손에 쥐어지는 경우 변형이 일어나고 손때를 타기도 하며, 프로텍터를 씌워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지만 카드의 구겨짐을 완벽하게 막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카드의 장수에 따라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시간을 불필요하게 많이 늘릴 수도 있습니다. 게임 로직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카드를 섞어야 한다면 그 횟수나 상황에 따라 모두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사위가 그 결과를 빠르게 도출하는 것에 비해 준비 시간이 다소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카드 카운팅이 가능한 구조의 게임에서, 덱을 다시 섞는 일이 없다면 후반에 명확한 승부 예측이 오히려 가능해지고 참여자들의 긴장을 풀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게임에서 이기고 질지를 명확하게 알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게임의 끝까지 집중하여 승부를 펼칠 것이기 때문에, 랜덤 요소로 사용하는 카드가 더 이상 랜덤의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다면 패배가 예상되는 플레이어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사위와 카드의 장단점을 살펴보았는데, 게임의 시스템에 따라 언제든 이들의 단점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카드가 랜덤 요소로 남아있게 하려고 전략적으로 덱을 다시 섞게끔 하는 장치가 있다거나, 주사위를 굴리더라도 나의 선택으로 일부 결과를 조정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주사위와 카드를 사용하는 방식 자체에도 기존의 것과 다르게 설계하는 디자이너도 있으니, 게임을 디자인할 때 자기만의 방법으로 장치를 세련되게 만들어 보는 것도 사람들이 게임에 흥미를 느끼게 하는 중요한 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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