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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트리비아

보드게임이 자꾸 커져요!

by RE: 아날로그 2022. 10. 8.

보드게임은 그 내용물에 따라 크기가 다양합니다. 카드로만 이루어진 게임은 한 손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박스로 구성되어있고, 그 안에 별도의 토큰이나 주사위가 들어있다면 그 크기는 조금 커집니다. 만약 테이블에 펼쳐놓고 진행하는 맵이 들어있다면 박스는 특히 더욱 커지며, 최근 '피규어'가 들어간 보드게임의 박스 크기는 어지간한 아령 무게에 필적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이 흔히 알고 계실 보드게임 중 맵이 들어간 게임을 살펴보자면 부루마불처럼 절반으로 접는 맵도 있고, 티켓 투 라이드나 클루처럼 1/4로 접는 맵도 있고, 카탄처럼 여러 타일을 배치해 만드는 맵도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모노폴리와 클루, 캔디랜드 등 서구권에서 역사가 오래된 게임은 보통 절반으로 접는 맵으로 시작한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 클루가 1/4로 접히는 맵이었다고요? 초창기의 클루 역시 절반으로 접는 맵이었답니다.

 

초창기의 클루(Cluedo) 맵은 절반으로 접혔다.

 

정확한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2000년대 초반에 들어와 새로운 시도를 한 게임들이 늘어나면서 게임 속 내용물의 형태가 다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티켓 투 라이드(2004)'인데, 맵의 크기가 20*30인치로 기존의 15*15, 20*20인치 넓이의 보드게임보다 조금 더 컸기에 절반으로 접기엔 박스 크기가 너무 커져서 1/4로 접어 맵을 박스에 담게 되었습니다. 또, 기존의 보드게임이 하나의 메인 메커니즘으로 전체 게임을 이끌어갔다면,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여러 가지 메커니즘을 버무린 게임이 끊임없이 출현하면서 내용물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가령 '아그리콜라(2007)'일꾼 배치자원 관리, 클로즈 드래프팅 등이 섞여 있어, 넓은 공용 공간과 개인 공간, 수많은 자원 토큰과 카드를 다 합친 기본판의 게임 무게가 2kg에 육박합니다. '클루(1949)'가 0.8kg, '카탄의 개척자들(1995)'과 '티켓 투 라이드(2004)'가 1.2kg인 것을 생각하면 혼자서 2~3개의 다른 보드게임 무게에 맞먹는 수준이지요.

 

그러다 2010년대에 들어와 보드게임 시장에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는데,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출시한 게임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개 '킥스타터'라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필두로 사람들에게 보드게임의 내용물을 어필하고 선 예매 및 주문을 받는 판매 방식이 유행하게 됩니다. 그 시작점으로 대표적인 게임이 '좀비사이드(2012)'인데, 플레이어들이 힘을 합쳐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각각의 임무를 완료하는 협동게임입니다. 여기에는 주인공들은 물론 다양한 종류의 좀비들이 모두 피규어로 구현되어 있어, 많은 사람이 엄청난 규모의 피규어가 담긴 박스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무게는 기본 판의 경우 무려 3kg이며, 이후 출시된 확장팩들을 포함하면 한 손에 들기에 손목이 피로한 수준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피규어가 들어간 보드게임의 흥행과 더불어, 2.3kg의 '테라 미스티카(2012)', 1.9kg의 '데드 오브 윈터(2014)', 3.8kg의 '갤러리스트(2015)', 2.4kg의 '이니스(2016)', 심지어 9.9kg의 '글룸헤이븐(2017)'까지 헤비 볼륨의 보드게임이 진짜 무거워지게 되었습니다.

 

'테라포밍 마스: 빅 박스'는 타일까지 모두 피규어처럼 조각되어있어 (무게와) 몰입감을 높였다.

 

여기에 덧붙여, 하나의 보드게임이 흥행한 이후 이에 덧붙는 확장팩들이 늘어남에 따라 모든 확장팩을 합본한 이른바 '빅 박스' 버전이 출시되면서 그 규모가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가령 '테라포밍 마스(2016)'의 경우 1.7kg인데, '헬라스&엘리시움', '서곡', '비너스 넥스트', '개척기지', '격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확장이 덧붙으면서 아예 '테라포밍 마스: 빅 박스(2021)'을 합본으로 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빅 박스 버전의 무게는 본판보다 0.6kg 추가된 2.3kg입니다. 800g의 본판 '한자 토이토니카(2009)'도 확장팩을 모두 포함한 '한자 토이토니카: 빅 박스(2020)'로 넘어오면서 1.8kg이 되었고, 1.4kg의 본판 '알함브라(2003)'도 확장팩을 모두 포함한 '알함브라: 빅 박스(2009)'로 넘어오면서 2.6kg이 되었습니다.

 

'파이어볼 아일랜드'에서 플레이어들은 불덩이를 피하며 보물을 수집해야 한다.

 

다양한 예시를 통해 살펴본 '무거운' 게임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게임 안의 구성 요소가 다양해지면서 시각적인 발전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보기에 예뻐졌다는 것도 중요한 사항이겠지만, 게임에서 마주칠 수 있는 도식과 텍스트에 대한 직관성과 가독성이 좋아졌다는 것도 한몫합니다. 저시력자 혹은 색각 이상자(색맹)분들의 경우 색깔뿐만 아니라 뚜렷하고 개성 있는 오브젝트 하나하나를 구분하기 더욱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또, 보드게임의 물리적 한계를 점점 벗어나면서, 단순히 예쁘고 아름다운 조형물뿐만 아니라 메커니즘 설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구조도 시도해볼 수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가령 '파이어볼 아일랜드(2018)'의 경우, 섬의 전경을 멋지게 꾸민 것도 좋지만 특유의 지형 구조로 인해 불덩이가 사방으로 굴러가며 플레이어를 괴롭히는 재미를 선보입니다. 다이스 타워에서 그치지 않고 '쇼군(2006)'의 전투 탑, '촐킨(2012)'의 톱니바퀴 등 다양한 물리적 설계가 등장했었는데 '무거운' 흐름의 등장으로 인해 더욱 창의적인 시도를 많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봅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게임의 난이도와 비례하지 않는 게임의 부피를 걱정하기도 합니다. 부족한 게임성을 화려한 피규어로 숨기면서 가격을 올리려는 심산 아니냐는 비판도 있고, 무게에 비례하여 전반적인 헤비 볼륨 보드게임의 가격대가 상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킥스타터와 같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에서 제작자는 더욱 신경 써서 게임 시스템의 장점을 알려야 할 것이고, 도입하려는 물리적 장치가 게임의 메인 메커니즘과 조화를 이루는지도 꼼꼼하게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게임이 커지는 현상 자체가 좋다 혹은 나쁘다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보드게이머들의 선택지가 더욱 다양해진다는 것은 보드게임이 일반적인 놀이 문화 시장으로 진출할 긍정적인 신호탄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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