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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인데 뭔들 재미 없으리

by RE: 아날로그 2021. 7. 6.

 

PC, 모바일, 콘솔과 같은 온라인 게임보다 보드게임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은 규칙이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엄연히 룰북이 있고, 제작자가 의도하는 플레이 방향이 있지만, 오프라인 게임인 보드게임은 유독 하우스 룰도 많고, 규칙을 입에서 입으로 구전하다 보니 간혹 다르게 알고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부루마불만 하더라도, 오디너리 룰에서 한 사람이 정확히 어떤 지폐를 몇 장씩 들고 플레이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선 땅(증서)을 모두 구입할 때까지 건물을 못 짓고 전반전을 진행하다가, 남은 증서가 6장 이하가 되었을 때 플레이어의 합의로 남은 증서를 경매로 매입해 모두 나누어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식적인 옵션 게임으로 전반전을 생략하고 바로 증서 구매만 한 뒤 후반전부터 시작하는 방법이 있는 데다가, 그마저도 더 쉽고 간단하게 각자의 환경에서 플레이했던 하우스룰이 구전되면서 이른바 주사위 땅따먹기 식으로 간편하고 직관적인 룰이 훨씬 많이 플레이됩니다. *여기에서 인용한 부루마불의 규칙은 실제 공식 부루마불 블로그에 업로드된 최신 룰북파일을 기준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아거게임즈의 보드게임 체험공간/작업공방 디아날로그를 포함해, 보드게임 카페들에서도 그런 일이 자주 있곤 합니다. 가령 루미큐브에서 시작하는 타일의 개수를 임의로 10개나 12개쯤 잡고 시작하시는 때도 있고, 할리갈리에서 종을 치는 과일의 개수가 5개 초과인 경우에도 종을 치며 플레이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카드 게임에서 시작하는 카드 장수나 핸드 제한을 다르게 알고 (혹은 그렇게 설정하고) 플레이하는 때도 종종 있어서 이따금 지켜보다가 해당 사실을 정정해드리는 편이고, 대개는 해당 판 혹은 그다음 판부터 정정한 규칙으로 게임을 재개하시곤 합니다. 하지만 간혹 비수가 꽂히는 말씀을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물론 여기에 제가 직접 대응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비매너이든 아니든 간에, 제가 더 간섭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게이머로서 마음 한쪽에는, 해당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온전한 경험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가득합니다. PC게임에서도 치트키가 '치트'키인 이유는 본래의 온전한 게임보다 더욱 유리한 조건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하기 때문인데, 상황에 따라서는 게임의 경험을 훼손할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보드게임 중에서도 플레이어의 전략적 판단으로 초중반 빌드업이 중요한 장르들이 있는데, 그러한 게임에서 과하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시작함으로 인해, 게임 디자이너의 본래 의도를 벗어난 게임을 하게 됩니다. 마치 소설책의 앞부분이 지루하다고 해서 중간 단원부터 읽기 시작하는 것과 같아서, 작가가 의도했던 감정선이나 스토리의 흐름을 지나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와 다른 관점을 제시해보려 합니다. 보드게임이라는 것도 저 옛날 역사에서는 땅바닥에 홈을 내고 조약돌을 옮기며 즐기던 게임이었지요. 그때부터도 물론 게임을 위해 규칙을 정해가며 즐겼을 것입니다. 요즘은 보기 드문 풍경이겠지만, 아이들이 포켓몬 딱지치기나 탑블레이드 팽이놀이를 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규칙을 수정하고 그것을 제안하면서 즐깁니다. "야, 이번에는 한 발짝 더 멀리서 날려보자"던가, "공격하는 딱지와 수비하는 딱지 크기가 다르면 안돼!"처럼 말입니다. 물론, 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규칙'의 존재와 규칙을 어기지 않는 것에 대해 익히면서 사회성을 키워나갑니다. 그런데 사회 구성원으로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벗어나지 않는 모습은 충분히 이러한 강점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원래 게임의 의도와 약간 달라지더라도 말이지요. 같은 게임 안에서 그들은 사회를 이루고, 사회가 정한 규칙을 따르는 범위 내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게임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변수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는 게임 제작자가 늘 겪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테스트플레이를 반복해 정량적 데이터를 가능한 한 많이 얻고, 어떤 흐름의 게임이 가장 설계의 의도에 부합하는지를 보면서 데이터를 정제하고 규칙을 설정합니다. 그러고 나서도 설계자는 게이머들의 '노잼' 혹은 '망겜' 판결에 가장 큰 리스크를 지게 됩니다. 게임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수치와 데이터를 통한 밸런스 설계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결국 게임은 플레이해야 그 가치가 발현되고, 게이머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소박하게 의견을 제시해보자면, 게이머를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엄밀하고 정량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고 있는지를 보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게임에서 얻는 즐거움은 생각보다 먼 곳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카드 한두 장쯤 더 들고 있는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이미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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